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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 근현대 한국경제사
    현대 한국 사회 2020. 4. 2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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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이 과목의 모든 내용은  허윤정교수님의 강의 내용과 교안의 내용을 필사 혹은 재구성한 것임을 알립니다**

     

     

    열강? 

     

    산업혁명이 실시된 이후 유럽의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등의 나라가 산업화로 군사적으로 무장하여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산업화에 늦었던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 중동 국가들이 경제적 침탈을 당해 제국주의의 희생양이다. 

     

     

     

    <한국 개항 초기>

    일본과 조약에 의해 개항된 강화도를 비롯, 몇 개항 항구를 통해 침탈당하게 된다.

    일본상인의 침투가 경제적 침탈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항구를 중심으로 하는 거류지 무역, 약탈무역(합법을 가장함), 영국 면직물의 중계무역(중계상이 일본인)의 형태를 띈다.

     

    1. 곡물의 유출 → 곡가 폭등→ 식량 부족

    2. 서양 면직물 유입 (산업화로 공장에서 찍어낸 면직물이 싸게 유입) → 수공업인 국내 면직물 산업이 타격을 입었다.

    3. 상업 침탈 : 일본 영사가 재판권을 갖음, 거류지지역에서 일본화폐 사용권을 갖음, 일본의 무관세 정책 및 일본 정부의 정책적 지원 → 조선의 부담이 됨.

    4. 일부 중개 상인 이익: 객주, 여각, 보부상 등은 내륙-항구 거류지를 오고가며 이득을 취함

     

    <임오군란 이후>

    • 일본의 상인들이 서양의 공산품을 들여왔다.

    • 필수품인 -쌀, 쇠가죽, 금 등이 일본으로 빠져나가게 됐다.

    • 청나라 상인들의 국내진출이 가속화 되며 일본 상인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경쟁 속 피해를 보는 건 국내 상인, 수공업자들이었다.

    → 조선의 농민 몰락, 수공업 붕괴 등으로 경제가 크게 흔들렸으며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방곡령사건

      국내식량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사전 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하여 제한적으로 법제적 장치를 갖게 되었다. 

    일본은 이 방곡령을 트집으로 손해를 배상하라는 후폭풍을 겪어야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이후>

    • 일본은 조선의 토지를 약탈하고 재정과 금융제도를 개편하여 조선 경제를 식민지 경제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 이 시기의 무역 수지는 점차적으로 악화됐다.

    • 일본의 토지 약탈도 본격화 되어 러일전쟁 이후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를 구실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합법적인 것을 가장하여 점점 일본에 넘어갔다.

    • 동양척식주식회사: 가상적인 회사
    • 빚을 지게하여 대한제국의 재정적으로 예속시켰다.
    • 1905년 화폐정리사업으로 국내 상공업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경제적 구국운동>

     

    경제자주권 수호 운동 자본주의적 근대경제 건설: 민족자본육성

    -방곡령

    -상권수호운동

     

    -독립협회의 이권수호운동

     

    -애국단체 '보안회'의 황무지개관권 반대운동

     

    -국채보상운동 : 일본에게 차관을 받으면서 진 빚을 갚자는 항일운동으로 생필품을 아끼고 저축하여 돈을 모았다.

    - 대한제국의 상공업진흥책

    -근대상인회

     

    -상회사 설립: 창신상회, 태평상회

     

    -제조공장 설립: 조선유기상회, 대한 (면직물)직조공장

     

    -민간인 철도 부설 노력

     

    -민간은행 설립: 조선, 산성, 천일

     

    #일진회 : 조선과 일본이 하나로 나가는 모임

     

    1904년 8월 송병준과 윤시병, 유학주(독립협회출신), 이용구(동학교) 등이 조직한 대한제국시기의 친일단체.

    1904년 8월18일 한성부(옛서울)에서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를 조직했다가, 8월20일 '일진회'로 개칭, 
    9월 동학의 잔존세력을 조직한 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로 통합했다.

     

    이후 회장 이용구와 송병준의 주도 하에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탄될 때까지 일제의 군부나 통감부(을사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 한성부에 일본 제국에 의해 설치된 정치와 군사 관련 업무를 보는 관청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자문 또는 섭정하는 형식, 조선총독부의 모체)의 조종하에 일본의 침략 병탄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전근대, 근대, 현대 추상적인 개념이다.

     

    물리적으로는 근대는 공장이 설치되는 산업화의 시작 시점이다.

    그러나 '근대적이다' 혹은 '전근대적이다.'라는 표현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전근대

    농경사회.

    비과학적이며 종교적이며 주술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비이성적이며 감성적인 부분에 주관점을 준다.

    예를 들어, 전근대적인 시대에는 아플 때 일반인들은 '귀신이 들렸다.'라고 생각하여 굿을 한다.

     

    #근대

    산업화는 근대의 상징이다. 
    과학적이며, 이성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삶에 있어서 기준을 만들기 시작한다. - 국가, 영토, 

    예를 들어, 근대에는 아플 때 약을 먹는다.

    표준화 및 대중교육을 발전 시킨다.

     

     

    #현대

    다양한 기준이 제시된다.

    그것 (표준) 만이 정답은 아니다.

     

    전근대적인 생각 = 과학적이지 못하다.

    근대적인 생각= 생각이 다양하지 못하다.

     

     

     

     


     

     

     

    3-2-2

     

     

     

    #경제수탈

     

    <1910년대>

    • 토지약탈: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하에 시행됐다 (1912-18).

      기한부신고제로 신고를 안하면 일본이 가져갔다. 일반 농민의 경우 일어를 몰랐기 때문에 그런 공고가 있는지도 몰라 많이 빼앗겼다.
      cf)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경제적 침탈을 위해 토지 약탈을 시행했다.

    • 산업침탈을 위한 (회사령), 산림령, 어업령, 광업령등을 만들어 배포했다.

     

    <1920년대>

    • 쌀약탈 : 산미증식계획 (1920-34)
      -군산과 목포 앞바다를 통해 쌀을 싣고 갔다. 이 때 나온 노래가 ‘목포의눈물’이다.

    • 회사령 철폐하고 신고제로 전환하며 일본독점자본의 진출을 쉽게 만들었다. 일본독점자본의 조선침투 강화시키켰다.
      -일본상품 무관세, 신은행령

     

     

    <1930년대>

    •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상황이다.

    • 1929년 경제대공항 이후 일본의 경제 사정 또한 안좋아지면서 조선 침탈을 본격화하고 뿌리 깊게 만들어 전쟁 후, 경제수탈은 더욱 심화되었다.

    • 조선을 병참기지화했다: 병참기지화정책, 전쟁수행을 위한 무기공장, 중공업을 육성하고 공업원료증산책을 만들었다.(남면북양: 남쪽에선 면화, 북쪽에선 양모)

    • 중일전쟁1937 도발 후 <국가총동원령>시행했다.

    • 인적, 물적 자원 수탈: 국민징용령등, 산미증식계획의 (더 크게)재개,
      식량배급제, 미곡공출제

     


    <민중의 수탈>

    수탈정책으로 일제시대 조선 민중의 생활상은 나라도 없고 배도 고파지게 됐다. 
    일본은 민중들에게...

    -농민들의 소작료를 인상하였으며,

    -수리조합비나 비료 값을 소작 농민에게 전가하였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도 남는 쌀이 많지 않아 농한기에 공사장이나 광산 등지에서 날품팔이를 하거나 도로나 철도 건설의 현장에 내몰리기도 하였다.

    -농촌진흥운동으로 농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농촌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미봉책을 사용했다.

     

    결국, 많은 농민들이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이주해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화전민이 되었다.

    일부는 만주, 연해주, 일본, 하와이, 남미, 블라디보스톡 등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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